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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쓸한 가을, 위로가 필요한 계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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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원규 작성일 11-10-24 07:56    조회 2,136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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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은 목소리로]쓸쓸한 가을, 위로가 필요한 계절


우리 속담에 ‘정승집 개가 죽으면 문상객이 문 앞을 막지만 정승이 죽으면 문상객이 끊긴다’는 말이 있다. 세상인심을 단적으로 잘 드러낸 말이다. 하물며 정승 같은 벼슬도 못해보고 돈도 없는 내가 치명적인 루게릭병에 걸렸는데 누가 내 집 주변을 기웃거리겠는가. 여러모로 볼 때 한번쯤 얼굴을 내밀 만한 사람이 그림자도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서운해 하는 것도 어리석은 일이 될 것이다. 세상인심을 탓하기에 앞서 자신의 과거행적을 먼저 돌아보고 반성하는 겸허한 자세도 필요한 것 같다.


“마치 바다 한가운데 떠있는 무인도에 버려진 것 같아요. 간병하느라 아픈 남편 곁을 잠시도 떠날 수 없어 바깥바람 한 번 마음대로 쐴 수 없는데, 온종일 기다려도 찾아오는 손님 하나 없고 전화 벨소리도 끊어진 지 오래예요. 이야기라도 나눠볼 사람 없이 들리는 건 남편의 인공호흡기에서 나는 기계음과 석션기 소리뿐이니 정말 숨이 막혀요. 이러다가 남편보다 제가 먼저 질식해서 죽을 것 같아요.” 이상은 내가 발병초기일 때 어느 환자가족이 우리 부부에게 한 말이다. 그때 나는 이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몰랐다. 진정 피를 토하는 울부짖음과 절규라는 것을 깊이 헤아리지 못하고 그저 하소연 정도로만 여겼다.


발병 전 나는 오지랖 넓게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며 얼굴 내밀기를 좋아했다. 친구들이나 직장동료들 등의 각종 모임에 열성적으로 참석했고 적극 활동했다. 지인들의 경조사가 있을 때는 아무리 바빠도 빠지지 않았고 부조금도 남부끄럽지 않게 챙겨서 냈다. 그 덕인지 몰라도 발병 후 실직하여 집안에 들어앉아 있을 때, 나의 건강과 안부를 염려하고 걱정해주는 사람들로 우리 집은 바빴다. 현관문 초인종은 자주 울렸고 전화벨 소리도 자주 들렸다. 그들의 격려와 위로는 막막한 처지에 놓여있는 나에게 큰 용기가 되었고 ‘그래도 내가 인생을 잘못 살지는 않았구나’라는 뿌듯함도 느끼게 해주었다.


그러나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했던가. 투병생활 10년을 훌쩍 넘긴 지금의 내 주변은 예전에 만났던 위의 환자가족의 상황과 크게 다르지 않다. 뽕나무 잎처럼 푸르렀던 날들은 꿈처럼 사라지고 사방을 아무리 둘러봐도 인기척이 없는 망망대해에 덩그러니 놓여있는 꼴이니 ‘상전벽해’가 따로 없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긴 병에는 효자도 없다는데 이것이 세상 돌아가는 이치이고 홀로 왔다 홀로 가는 것이 인생이 아니던가.


사실 이 쓸쓸함과 씁쓸함은 나 스스로 자초한 면도 있다. 몸이 아프면 만사가 귀찮은 법이다. 병이 깊어가면서 나는 웬만한 세상사에는 심드렁해졌고 사람 만나는 것도 종종 피곤함을 느끼며 피하게 되었다. 어떤 방문객은 아픈 나와 비교하며 자신의 건강과 근황 등을 과시하여 상처만 주고 간다. 또 어떤 이는 정작 병문안 대상인 내겐 말 한마디 건네거나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뒤돌아선다. 이럴 때 언어장애와 전신마비 상태인 나는 그저 두 눈만 끔벅거리며 심한 자격지심에 빠져든다.


물론 내게도 보석같이 귀한 벗과 이웃이 남아있다. 그리고 나와 별다른 인연도 없으면서 아무런 대가도 없이 나를 찾아주고 도와주려 애쓰고 있는 사람들도 있다. 그저 송구스럽고 감사할 따름이다. 아울러 근래 우리 루게릭병 환자들에 대한 사회적 관심도 점차 늘어나고 있는 편이다.


그 가운데 ‘인터알리아 공익재단’은 벌써 수년에 걸쳐 우리 환자들을 위해 루게릭병협회를 통하여 많은 지원을 해오고 있다. 작년만 해도 환자 경관식으로 7000여만원, 간병도우미 지원으로 5400만원 등 총 1억2400여만원을 지원했고 올해는 그 지원규모가 더 늘어났다. 무슨 건물 같은 것을 지어주고 요란한 흔적을 남기는 것이 아니라, 도와줘도 표시가 나지 않아 도와주기 쉽지 않은, 그러나 환자들에게 꼭 필요한 영양식과 간병지원 등으로 바로 환자 곁을 조용히 지켜주고 있는 것이다. 매년 11월 초에는 루게릭병 환자만을 위한 미술관 관람과 작은 음악회도 마련하여 격려한다. 여러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변함없이 우리를 후원해주고 있는 박은주 이사장과 인터알리아 아트컴퍼니 가족들에게 환자의 한 사람으로서 깊은 감사와 경의를 표한다.


가을이 깊어가고 있다. 가을은 ‘외로우니까 사람이다’라는 대명제를 새삼 일깨우며, 서로 보듬고 위로하며 살아가라고 다독이는 계절인 것 같다. 외로운 누군가를 기억하며 잊지 않고 함께한다는 것은 매우 아름다운 일이다. 위로와 위안이 필요 없는 사람은 없다. 나도 제한된 수동적 견지에서 벗어나 나보다 더 외로운 사람은 없는지 천천히 주변을 돌아보는 여유를 가져야겠다. 그리고 ‘위로받기보다는 위로하고, 이해받기보다는 이해하며, 사랑받기보다는 사랑하’는 사람으로 살아가도록 나름대로 노력해야겠다.


<이원규 시인>


입력 : 2011-10-21 19:21:58수정 : 2011-10-21 19:2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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