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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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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정희 작성일 08-08-23 19:47    조회 2,138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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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이여 안녕.
오늘이 처서라 글을 올리고 싶은 마음이 제철 만난 종달새처럼 지저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더운 백일간의 힘듬은 이제 '휴우'하고 어쨋든 안도의 숨을 한번 쉽니다.
하루에 몇번씩 계곡물이 그리웠지만 내가 할 수 있는건 얼음주머니를 등에 대고, 에어컨 온도를 낮추고 발은 타올로 꼭꼭 싸고 손에 진땀을 흘리며 실내 온도와의 싸움을 하는것이었습니다.
오늘은 에어컨도 안 틀고 창문을 활짝 열어 자연이 주는 공기의 신선함을 피부로 느낍니다.
그런데 사실은 자랑하고 싶어 이 글을 쓰는지도 모릅니다.
더위를 핑계삼고 처서를 앞세우고...
그 더운 여름 나는 날마다 소설을 쓴답시고 하루에 세,네시간씩 구술하고, 프린터로 뽑은 글들을 수정하고... 내용이야 어떻든 A4용지 100장을 썼습니다.
겨울까지 쓰면 몇 장이 될지 나도 모르겠지만....
나는 구도 소설이라 하고, 딸은 연애 소설이라 하고, 아들은 할일도 없는데 신경 쓰지말고 그냥 쓰라고 합니다.
글을 쓴 후 출판이 안되면, 제본을 떠서 "요즘 어떻게 지내십니까?"라고 안부 전화를 하시는 분들께 "이렇게 지냈어요." 라며 한권씩 드리면 된다고 그냥 쓰랍니다.
어쨋든 이 여름 우리는 잘 투쟁했고, 치열하게 보냈고, 공포에 가까운 고통 가운데서도 하늘 소리를 들으며 처서를 맞았습니다.

나는 이 가을 브람스의 현악 6중주 2악장에 취해서 루게릭도 내려놓고, 인공 호흡기의 번쩍이는 형광판 숫자도 잊어버리고, 죽음과 삶의 경계도 흐릿하게 살아 보려합니다.
모두들 희망을 가집시다.
치료의 연구실 불은 환하게 켜져 있으니, 우리는 영혼의 노래를 들으며 가을의 맑은 하늘에서 위로와 평화를 찾아 봅시다.
자주 쓸께요.

아직 14년차 루게릭 환자 이정희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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